메이지가쿠인 대학의 역사와 현재

A. 햅번의 성장
B. 햅번의 결혼과 중국에서의 전도
C. 햅번의 귀국후 뉴욕 생활
D. 햅번의 일본 전도 지원 (志願) 과 방일 (来日)
E. 햅번의 카나가와 (神奈川) 에서의 의료 활동
F. 햅번의 요코하마 (横浜) 에서의 교육과 사전 편찬 활동
G. 바라 (Ballagh) 부부에게 햅번 학원을 이양

H. 도쿄잇치신학교 (東京一致神學校) 의 설립
I. 햅번 학원의 후신 : 잇치에이와 (一致英和) 학교 에이와 (英和) 예비학교
J. 메이지가쿠인의 창립과 시로가네 캠퍼스의 개설
K. 메이지가쿠인 제1회 졸업식
L. 햅번의 귀국과 햅번의 생애의 신념 "Do for Others"
M. 햅번의 생애의 신념과 현재의 메이지가쿠인 대학

A.햅번의 성장

메이지가쿠인 대학의 창설자인 햅번 (James Curtis Hepburn,1815-1911) 은 1815년 3월 13일 펜실베이니아주 밀튼에서 태어났습니다. 햅번가 (家) 의 선조는 스코틀랜드에서 북 아일랜드로 이주한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입니다. 신앙심이 두터운 부모님 밑에서 성장한 햅번은, 미국 장로교회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가 교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프린스톤 대학에 1831년에 진학하였습니다. 졸업 후, 의학으로의 길을 택해 펜실베니아 대학에 진학, 1936년에 졸업하였습니다.


햅번의 생가

B. 햅번의 결혼과 중국에서의 전도

개업의로서 의료계에 종사하면서, 한편으로는 해외선교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던 햅번은, 해외선교에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클라라 (Clara Mary Leete,1818-1906) 와 만났습니다. 1840년에 결혼한 두 사람은 미국 장로교회의 싱가폴의 샴에의 선교사 파견 계획에 응모하여, 이듬해 41년 3월 보스턴항을 출항하였습니다.

1841년 7월 싱가폴에 도착하였으나, 부부는 항해중 부인 클라라의 유산이라는 슬픔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싱가폴에서 선교지를 당초의 샴에서 중국의 아모이로 변경하였으나 아편전쟁으로 인해 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2년 후인 43년 11월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 사이 햅번 부부는 또 한 자녀를 생후 불과 몇시간만에 잃는 불행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경관이 아름다운 아모이는 수질이 좋지않고 말라리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클라라는 이 곳에서 남자 아이를 출산하였고 사무엘 ・데이빗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햅번의 자녀중 무사히 성인으로 자란 아이는 사무엘 뿐이었습니다. 클라라는 산후회복이 좋지 않을 뿐더러, 부부 모두 말라리아에 걸리게 되어 전도활동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가족 3명은 46년 3월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클라라

C.햅번의 귀국 후 뉴욕 생활

귀국 후 햅번은 뉴욕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구세계 (舊世界) 로부터 성난 물결처럼 밀려드는 이민들로 넘쳐있었던 당시의 뉴욕은 위생 상태도 최악으로 역병이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햅번은 콜레라에 걸린 환자들에게 적절한 치료를 베풀어 의사로서의 명성이 높아가는 한편, 안과로 전통있는 펜실베니아 대학출신에 당 분야에서도 정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은 나날이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몹시나 바쁜 생활로 귀국후에 태어난 아이들 3명 (2살, 3살, 5살) 을 열병 (성홍열과 이질) 으로 연달아 잃는 비운을 맞게 되었습니다. 햅번은 남동생 슬레이타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1855년 8월 1일자)
'나의 가슴은 터질것만 같다. 뉴욕은 참으로 무서운 곳이로구나. 나에게 날개가 있어 호젓한 곳으로 날아가고 싶다. 이것들이 나의 이기적인 생각이라면 신이여 용서하소서.'


뉴욕 시대의 햅번

D.햅번의 일본 전도 지원 (志願) 과 방일 (来日)

미국은 1858년 막부와 일·미수호통상조약을 채결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햅번은 같은 해 연말 미국장로교회 해외 전도국을 방문해 일본으로 파견을 신청하였고, 이듬해인 59년 1월에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햅번은 양친의 이해를 얻지 못한 채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사무엘 (당시 14세) 을 지인 (知人) 에게 맡기고 번창하고 있던 병원도 닫고서 1859년 4월 24일 뉴욕항을 떠났습니다. 희망봉을 돌아 홍콩과 상하이에 잠시 정박, 10월 17일밤 카나가와 (神奈川) 바다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햅번은 후년 뉴욕의 전도단 본부 앞으로 보낸 편지에 (1881년 3월 16 일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가야 한다는 소명을 받았을 때, 저의 가슴을 고향에 얽매이게 하던 무수한 권속을 끊고 기쁨에 가득차 선교지인 이 곳 일본에 왔습니다. 언제나 생각합니다만 중국에서 저의 최초의 선교사로서의 생활과 경험은 일본에서의 제 2의,무엇보다 중요한 선교사업을 위함이었다는 확신이 듭니다.'


장로교회 해외 전도국 빌딩

E.햅번의 카나가와 (神奈川) 에서의 의료 활동

카나가와 (神奈川) 의 정토종 성불사 (浄土宗 成仏寺) 를 주거지로 정한 햅번 부부는, 1960년 주변의 일본일들과 친교를 맺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인에게 그리스도교의 포교활동을 하는것은 막부로부터 금지되었으나 의료행위는 묵인되었습니다. 뉴욕의 전도단 본부 앞으로 보낸 서간 (1860년 5월 14일) 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우리 부부가 길을 걷고 있을 때 등, 모두들 즐거운듯이 미소를 지어 인사 해줍니다. 아직 그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약을 지어주지 않았지만, 요 며칠동안 4명의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그 중 3명은 번소 (番所) 를 담당하는 훌륭한 무사들이었습니다. 대단치 않은 수술을 이었는데도 모두들 고통이 가시게 되어 매우 기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불사 (成仏寺)

평판을 듣고, 각지로부터 햅번에게 치료를 희망하는 일본인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의료활동에 성불사 (成仏寺) 는 협소하다고 생각하여 1861년 봄, 가까운 종흥사 (宗興寺) 로 진료소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종흥사의 진료소에서의 의료활동 개시 반년 후인 9월에, 막부로부터 진료소 폐쇄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뉴욕 전도단 본부에 보낸 서간 (1861년 9월 8 일자) 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저의 진료소는 폐쇄되었습니다. 짧은 5개월 동안만이 진료소를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환자수는 매우 적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늘어, 그 후 3개월 간은 하루 평균 100명의 환자를 진찰했습니다. 조수가 없는 관계로 거의 기록을 하지 못해 인원수만 말씀드립니다만, 합계 3,500 명의 환자에게 처방전을 써주었습니다. 매회 다른 환자로 연인원수는 아닙니다. 다른 수술 이외에 반흔성 내반 (瘢痕性内反 ;안질의 일종) , 트라코마 (Trachoma; 만성결막염) 로 인해 눈썹이 각막을 향하여 자극하는 증상의 수술 30회, 익상편 수술 3회, 안구 적출이 1회, 뇌수종의 수술 5회, 등부분의 부스럼 절개 1회, 백내장의 치료 13회, 치루의 수술 6회, 직장염 1회, 티푸스의 치료 3회 시술하였습니다. 그 중 1번의 백내장 수술이 결과가 좋지 않았고, 나머지는 좋은 결과였습니다.'

1870년부터 햅번와 친분 관계에 있던 W.E.그리피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의 일본의 위생 상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햅번의 의료 활동이 일본인에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리에 거지가 많은 것은 물론이고, 신의 닮은 형태로 창조되었다는 인간의 모습들을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하게 왜곡하는 불결함과 꺼림칙한 병들이 만연하고 있었다. 일본에는 병원은 없었다.'

의료 활동의 개시와 거의 동시기에, 햅번 부부는 일본인에 대한 교육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햅번 학원의 원형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며, 후의 메이지가쿠인 그리고 훼리스 (Ferris) 여학원으로 이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뿌려졌습니다. 1861년 6월 22 일자의 서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수학 (修學) 자나 학자의 소클래스를 모으고 있습니다. 진료소에 흥미를 가지고 저의 조수가 될 두 명의 학생이 몇일 동안 이곳에 옵니다. 일본어 교사 (햅번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본인-인용자) 와 우리들의 하인의 아들이 클래스를 만들고, 아내가 매일 오후 1시간 또는 2시간 동안 영어를 가르칩니다. 두 사람 모두 인내심이 강하고 근면한 학생입니다.'


종흥사 (宗興寺)

F.햅번의 요코하마 (横浜) 에서의 교육과 사전 편찬 활동

요코하마 (橫浜) 거류지 (居留地; 일본 국내에 한해, 외국인의 거주 겸 영업을 위해 지정한 지역을 뜻합니다. - 번역자) 39번지에 신축된 주택에 햅번이 이전한 것은 1862년 12월이었습니다. 주택에 부설 (付設) 진료소를 이용한 교육 활동은 그 다음해 가을부터 햅번 부인의 노력으로 본격화 되어, 햅번 학원이라는 이름이 탄생하였습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 (高橋是淸; 일은총재, 대장대신, 총리대신을 역임, 2·26사건으로 반란군의 의해 살해됨), 하야시 타다쓰 (林董; 주영공사 (駐英公使) 는 일・영 동맹 체결에 노력하였고, 외무대신, 체신대신을 역임) 그리고, 마쓰다 다카시 (益田孝 ;미츠이물산 (三井物産) 의 창설자)을 비롯한 뛰어난 인재들이 햅번 학원에서 공부 하였습니다. 특히, 하야시 타다쓰는 후에까지 햅번 부부의 학은 (學恩) 을 잊지 않고, 자신의 이력서의 학력란에 햅번 학원 출신이라는 것을 명기했다고 합니다.


햅번저

아메리칸·네덜란드 개혁 교회 (Dutch Reformed Church in America) 의 선교사 키더 (Mary Eddy Kidder,1834-1910) 가 70년에 햅번 학원에 부임하였습니다만, 72년 여성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햅번 학원에서 독립하였습니다. 후에, 훼리스 세미나리 (현재의 훼리스 여학원) 으로 발전합니다.

성서의 일본어 번역을 위해서도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햅번은, 의료활동를 행하면서 열심히 일본어 연구와 어휘의 수집에 임하였습니다. 1864년 11월 28일자 서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사전이 완성될 즈음에는 외국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에게 있어서도 매우 큰 도움이 될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전의 편찬은 외국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스스로 기획한 이 큰 사업과 막중한 책임을 생각하면 전율을 느낄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도움에 의해서만이 이 사업을 완성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하나님께만 이 모든 영광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키더

당시 존재하고 있던 유일한 영일 (英和) 사전은 에도 (江戶) 막부의 서양학문조소 (洋學調所) 가 1862년에 발행한 "영일대역포켓형사전 (英和対訳袖珍辞書) " 입니다. 이 사전은 영어와 일본어의 단어가 각각 하나씩 대조된 말하자면 단어장과 같은 형식의 사전이었습니다. 햅번은 일본 방문 8년째인 1867년, 일본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일영・영일 사전인 "일영어림집성 (和英語林集成) "을 출판하게 됩니다. 그 후에도 어휘의 증보뿐 아니라 용례등 내용적인 면에 충실하도록 노력하여, 1886년에 제 3판의 출판이 알려졌을 때에는 대단한 호평으로 예약만으로도 18000부에 달했다고 합니다.

"일영어림집성"을 뛰어넘는 사전의 출현은 1896년에 산세이도 (三星堂) 가 발행한 브링클리・난죠 (南条)・이와사키 (岩崎) 공동편찬의 "일영대사전 (和英大辞典) "이었습니다. 그 전 29년 동안, 햅번의 사전은 일본 사회에 있어 확고부동안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사전의 편찬시에 고안된 햅번식 로마자 표기법이 100년이상 지난 지금에도 문부 과학성의 훈령식 (訓令式) 로마자 표기법을 지속시킬 수 있는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햅번사전'의 일본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라(G.Ballagh)부부에게 햅번 학원을 이양

햅번은 나이가 듦에 따라 성서 번역 작업에 시간을 집중하기 위해 1875년에 이르러 학교 교육의 전문가이며 신앙심이 두터운 바라 (John Craig Ballagh,1842-1920) 와 그의 부인에게 햅번 학원을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햅번 학원은 이후 바라 학교로 불리게 됩니다. 76년에는 진료소도 폐쇄하고 요코하마 야마노테 (横浜山手) 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햅번은 바라 (Ballagh) 의 교육자로서의 역량을 1882년 4월 6 일자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바라 (Ballagh) 씨 만큼 학교 경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견실하고 참을성이 많으며 친절한 사람으로 학교에 대해서도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라 (Ballagh) 씨는 학생들의 아버지 혹은 친구가 되어 실제로도 원만히 그들을 통제합니다. 만약 당신이 일본의 청소년를 알고 있다면 바라 (Ballagh) 씨가 하고 있는 일이 대단한 일이라는 것도 아실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일본의 청소년을 천사라고도 하겠지만 오히려 무지 (無智) 에 건방지고, 제멋대로이며, 말을 잘 듣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J.C. 바라

H.도쿄잇치신학교 (東京一致神學校) 의 설립

미국 장로교회, 미국・네델란드 개혁교회, 그리고 스코틀랜드 일치 장로교회 (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 의 세 개의 전도단은, 상호협력 아래 1877년 도쿄 츠키지 (築地) 에 "도쿄잇치신학교 (東京一致神學校) "를 설립했습니다. 이 때 미국・네델란드 개혁 교회의 브라운 (Samuel Robbins Brown,1810-1880) 이 요코하마 야마노테 (横浜山手) 에 차렸던 브라운학원 (철거지에 현 요코하마 공동설립학원 소재) 을 비롯해 각 전도단의 선교사가 주재하던 신학학원 (神學學院) 은 도쿄잇치신학교에 합류했습니다. 이 도쿄잇치신학교는 후에 메이지가쿠인의 설립에 참가하게 됩니다.


S.R. 브라운

I.햅번 학원의 후신 : 잇치에이와 (一致英和) 학교 에이와 (英和) 예비학교

바라교 (Ballagh校) 라고도 불리웠던 햅번 학원은 1880년에 동경 츠키지 (築地) 로 이전, 컬리지 코스를 정비하여 츠키지 대학교라고 개칭됩니다. 이 츠키지 대학교는 신학교 교육의 예비교육을 행하고 있던 요코하마 야마노테 (横浜山手) 의 센시 (先志) 학교를 1883년에 합병하여 "잇치에이와 (一致英和) 학교"라 개칭합니다. 햅번의 후신인 이 잇치에이와 학교는 4년제의 대학과 2년제의 예비과로 구성, 대학에서의 수업은 모두 영어로 행해졌습니다. 그 후에 예비과는 동경 칸다 아와지쵸우 (神田淡路町) 로 이전 "에이와 (英和) 예비학교"가 되었습니다. 이 잇치에이와 학교와 에이와 예비학교도 메이지가쿠인의 설립에 참가하게 됩니다.

J.메이지가쿠인의 창립과 시로가네 캠퍼스의 개설

선교사 브라운의 신학교육에 발하는 "도쿄잇치신학교", 그리고 햅번 학원의 후신인 "잇치에이와 예비학교"와 "에이와 예비학교"의 세 교육기관의 합동에 의해 1886년 "메이지가쿠인"이 설립되었습니다. 1886년에 개최된 최초의 이사회에서 메이지가쿠인 창립안을 제정했습니다. 도쿄잇치신학교는 메이지가쿠인 일본어 신학부, 잇치에이와 학교는 메이지가쿠인 보통부 본과 (普通部本科), 에이와 예비학교는 메이지가쿠인 보통부 예과 (予科) 라고 개칭되었고 학교의 부지는 현재의 메이지가쿠인 대학이 있는 시로가네로 정해져 이듬해 87년에 교사 (校舍) 와 기숙사가 준공되었습니다. 산담 관이라 불려진 교사 (校舎) 는 당시 동경 최고로 불리운 목조 대건축물로서 위용을 자랑했던 기숙사는 햅번관으로 불리워 시로가네의 언덕에 우뚝 세워졌습니다. "메이지가쿠인 오십년사" (1927년) 는 이 두 건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산담 관

'산담 관은 그 후 2층의 강당의 커다란 양등 (洋燈) 아래에서 매주 금요일 밤마다 개인 문학회를 개최하여, 재학생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햅번관의 5층의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좋은경관으로 서쪽으로는 무사시노 (武蔵野) 에서 치치부 (秩父) 까지 첩첩산중 너머의 후지 (富士) 산이 바라다 보이고, 동쪽에는 시나가와 만 (品川湾) 의 바다 건너의 보소 (房総) 의 산들을 조망, 그 곳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매일아침 새벽기도회를 가진 일, 한적한 밤의 교정에 많은 창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은은한 불빛들이 교사에 머물던 재학생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햅번 관

K. 메이지가쿠인 제 1회 졸업식

1891년 6월에 메이지가쿠인의 제 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제 1회 졸업생은, 시마자키 토손 (島崎藤村), 바바 고쵸 (馬場狐蝶), 도가와 슈코츠 (戸川秋骨) 등 20명이었습니다. (바바와 토카와는 후에 모두 케이오 의숙 (慶應義塾) 의 교수역임) 그 때의 모습을 시마자키 토손은 자전적 소설 "벚꽃의 열매가 익을 때 「桜の実の熟する時」"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문장중의 '捨吉 (스테키치)'는 시마자키 토손)


졸업사진

'학교의 선생님들께서는 우리 일동을 예배당에 모아, 곧 사회에 진출하는 청년들을 위해 전도의 축복을 기원해주셨다. 성서의 낭독, 찬송가의 합창, 이별의 기도가 있었다. 담당학과 선생님들께서 각자 서명을 한 꽃처럼 큰 학교의 도장을 찍은 졸업 증서. 이윽고 모두가 교당에서 나와 그 옆에 있는 초지에 한 구석으로 모여 들었다. 우리는 모여든 그 자리에다가 새로운 기념수를 심었다. 그리고 나서 나무 밑에 그들의 키 만한 돌을 세웠다. 마지막으로 스테키치는 수가와 아다치 같은 벗과 함께 그 돌에 세긴 문자 앞으로 다가섰다.
"메이지 24년 - 졸업생"」


시마자키 토손 (島崎藤村)

이 때의 졸업생인 바바 고쵸 (馬場狐蝶) 의 졸업 증서가 유족들로부터 기증되어 메이지가쿠인 자료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즐업 증서 왼쪽에 있는 서명< President of Board of Directors J.C.Hepburn >은 초대 총리 햅번씨의 것입니다. 우측란에 있는 바라(Ballagh), 와이코프 등의 교수의 사인과 담당과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좌측하단에는 토손 (藤村) 이 이야기 한 '꽃과 같이 큰 학교 도장' (보통학부의 인장) 이 찍혀 있습니다. 메이지가쿠인 대학의 졸업식은 11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이와 같은 분위기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바바 고쵸 (馬場狐蝶) 의 졸업 증서

L.햅번의 귀국과 햅번의 생애의 신념 "Do for Others"

일본에서 33년간 체재한 후, 1982년 가을 햅번 은 미국으로 귀국을 결심하였습니다. 시로가네의 메이지가쿠인에서 개최된 송별회 중 헤어짐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저는 33년간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일본인들을 위해 힘을 다해 섬길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아, 저는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저의 일은 끝났습니다. 본국에서 잠시나마 쉬고나서 하늘에 계신 부모님들이 계신 천국으로 가렵니다.'

연로해 일본을 떠나려 하는 햅번의 가슴에는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입니다. 햅번은 또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들 부부에게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지만 영원히 일본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햅번 (94세)

1906년 3월 4일 클라라는 88세로 세상을 떠나고, 햅번은 5년 뒤인 1911년 9월 96세의 생애를 뉴저지주 이스트오렌지에서 마감했습니다. 우리는 일본인과 메이지가쿠인을 지금도 맑고 순수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을 햅번의 생애를 생각합니다. '33년간 이 나라에 머물면서 일본인들을 힘을 다해 섬기고, 헌신한 ' 햅번의 생애를 통틀어 보여주었던 신념은 "Do for Others" 인 것입니다.

햅번 학원에서 공부할 무렵, 특히 클라라 부인으로부터 사랑을 많이받은 주영공사로서 영・일동맹체결에 힘써 외무대신으로도 올랐던 하야시 타다쓰 (林董) 는, 햅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그의 생애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며 주저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심전력해 온 인생이었다. 박사는 내 조국 일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애의 가장 좋은 시절을 아낌없이 바쳤다. 박사가 주어진 사명를 마치기위해 헌신했던 모습은 세계의 많은 공인 (公人) 의 업적과 행위 때문에 인류의 찬사를 받은것과 같은 화려함은 없지만, 그 생애가 고결하고 존경받아야 한다는 점은 결코 않을것이다.'


하야시 타다쓰 (林董)

M. 햅번의 생애의 신념과 현재의 메이지가쿠인 대학

메이지가쿠인 대학은 햅번의 교육기관입니다. 메이지가쿠인 대학은 지금도 창설자 햅번의 생애의 신념인 "Do for Others"를 교육의 이념으로서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 이념은 메이지가쿠인 대학의 역사와 현재에 면면히 숨쉬고 있습니다.

대학의 기본적인 기능은 '연구'와 '연구 성과인 교수', 즉 '교육'에 있습니다만, 메이지가쿠인 대학에서는 '연구 성과를 운용하는 인간의 인격을 묻는 교육'이라는 기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Do for Others"라고 하는 교육 이념을 존중하는 기독교의 입장에서의 인격교육"이 됩니다.


시로가네 교사 본관

예를들어, 학생과 교원의 개인적 접촉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인격교육' 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혹은, 클럽 활동중에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연한 것이며 시스템화 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주의 (主義) 교육을 표방한 이상, 교육 시스템으로서의 체재와 내실을 갖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교육 시스템이 바로 자원봉사 센터, 국제 교류 센터, 그리고 캐리어 센터라고 생각합니다.

자원봉사 센터는, 한신아와지 (阪神 淡路) 대지진 때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학생들의 자원봉사 활동을 계기로, 1998년 대학 조직의 일부로서 만들어졌습니다. 긴 세월에 걸쳐 "Do for Others"라하는 교육 이념이 캠퍼스에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 조직내에 속해 있지만 전임 코디네이터와 학생 스태프가 주체적이고도 자주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요코하마 교사 예배당

자원봉사 센터는 상비되어 있는 1500건이 넘는 자원봉사 정보로 학생들을 서포트 할 뿐만 아니라, 요코하마시 국제교류협회의 유엔기관 인턴쉽, 본 학원의 독자적인 해외 봉사활동등의 다채로운 커리큘럼을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메이지가쿠인 대학 자원봉사 센터는 선진성과 그 독자적 성격으로 인해 전국의 대학 봉사활동에 있어 지도자적인 입장을 십분 자각하고 한층 분발하고 있습니다.

국제 교류 센터는, 본 학원의 학생 190명을 해외 대학의 유학생으로 파견, 161명의 유학생을 해외로부터 받아들였습니다. (2004년 현재) 국제 교류 센터는 메이지가쿠인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의 교류를 촉진하고, 상호 이해가 더욱 깊어질수 있도록 "Do for Others"의 교육 이념을 실현하는 교육 시스템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앞으로 한층 교환학생 체제를 충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캐리어 센터는 학생들에게 취업 정보 알선과 취업 기술 제공의 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나아가 "Do for Others"의 교육이념을 실현하는 인격교육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캐리어 센터의 스태프들은 인간으로서 사회에 공헌하는 의의를 학생과 함께 고민, 학생들을 서포트 함과 동시에, 이 과정에서, 학생 본인의 파악하지 못한 잠재능력을 이끌어 내는 연구를 항상 힘쓰고 있습니다..


파레트 존 시로가네

「메이지가쿠인 오십년사」 1927년, 메이지가쿠인
「메이지가쿠인 구십년사」 1967年, 메이지가쿠인
「메이지가쿠인 백년사」 1977년, 메이지가쿠인
「메이지가쿠인 백년사 자료집 (제3집)」 1976년, 메이지가쿠인 백년사 위원회
시마자키 토손 (島崎藤村) 「벚꽃의 열매가 익을 때 (桜の実の熟する時)」 1919년 1월 1일 발행, 슌요우도 (春陽堂)
다카야 미치오 (高谷道男) 「닥터 Hepburn」 1954년, 마키노(牧野) 서점
다카야 미치오 (高谷道男) 편역 「Hepburn 서간집」 1959년, 이와나미 (岩波) 서점
다카야 미치오 (高谷道男) 「Hepburn」 (인물총서 61) 1961년, 요시카와 코분칸 (吉川弘文館)
다카야 미치오 (高谷道男) 편역 「Hepburn의 편지 (증보판)」1978년, 유린도 (有隣堂)
모치즈키 요코 (望月洋子) 「Hepburn의 생애와 일본어」1987년, 신쵸샤 (新潮社)
W.E.그리피스 저, 사사키 아키라 (佐々木晃) 역 「Hepburn - 동시대인이 본 -」 1991년, 쿄분칸 (教文館)
메이지가쿠인 인물 열전 연구회 「메이지가쿠인 인물 열전」 1998년, 신쿄(新教) 출판사
나카지마 코지 (中島耕二)・츠지 나오토 (辻直人)・오니시 하루키 (大西晴樹) 「장로・개혁 교회 일본 방문 선교사 사전」 2003년, 신쿄 (新教) 출판사
하라 유타카(原豊) 「Hepburn학원을 잇는 사람들」 2003년, 자비(自費) 출판
무라카미 후미아키 (村上文昭) 「Hepburn 이야기」2003년, 쿄분칸 (教文館)
오다 야스코 (小田泰子) 「의사 Hepburn과 그 시대」 2004년 9월, 마루젠 센다이 (丸善仙台) 출판 서비스 센터